본문 바로가기

800 문학

『의심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 - 한성욱 | 책 구성·요약·후기·리뷰

'밀리의 서재'를 뒤지다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서 읽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었다.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그 속에서 생각에 지칠 때면 아무런 근거 없는 생각에 정착해버리곤 했던 나였기에 이 책을 쓴 저자는 어떤 유형의 사람일지 궁금했었다. 나란 사람은 의심하면서도 무근본 생각에 타협하며 살아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의심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라는 제목을 선택한 저자는 과연 누구일까. 

 

책 표지
『의심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 - 한성욱

 

 

책의 구성

 

이 책은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서 장의 수가 제법 많은 편인데, 각각의 장은 다음과 같으며 장마다 10개 내외의 글들이 모아져 있다. 짧은 글들을 모아둔 것이라 분량은 길지 않은 편이기에 1-2시간 이내로 완독이 가능하다. 주제는 개인마다 심오할 수 있으나, 저자와 같은 고민을 한 번쯤 해보신 분들이라면 공감을 연료 삼아 이해의 속도를 높일 수 있다. 

 

1. 생에 대한 의심
2. 성공에 대한 의심
3. 물질에 대한 의심
4. 인간관계에 대한 의심
5. 사랑에 대한 의심
6. 종교에 대한 의심
7. 행복에 대한 의심
8. 죽음에 대한 의심
9. 의심 끝에 얻은 믿음 

 

 

 

후기

 

가장 먼저 저자 소개란을 살펴보면,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휴학 후 1년 간 독서를 하였다고 한다. 20대라서 가능했던 것일까. 아무래도 30대 이상만 되더라도 결혼을 했다면 육아, 경제활동 등으로 하루가 채워지게 되므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책만 읽겠다는 결심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터인데 말이다. 인류의 예상수명을 고려했을 때 살 날이 더 많을 20대이기에 하루라도 젊을 때에 앞으로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알아내고 싶기도 했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 계획 없이 무작정 시작한 1일 1권 라이프는 날마다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하루 동안 한 권의 책을 읽는 건 매일 세상이 바뀌는 것과 같았죠. 하루는 진화론이 말해주는 생명의 이야기 안에서 놀기도 하고 다른 날은 자아란 무엇인가 따져보는 철학자의 삶 속에 있기도 했어요. 

 

저자 소개란을 읽으며, 독서만 매일할 수 있는 1년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은퇴하고 나면 빨라야 40대일 텐데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지금 머릿속에 든 생각들이 너무 많기에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만한 정답들을 알아가고 싶은 욕심이 컸기 때문이다. 물론 계속 돈을 벌어야 하고 아마 매일매일 책 1권을 다 읽을 시간은 충분치 않은 상황이기에 '1년 간 매일의 독서'라는 목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주 1-2권의 책으로 만족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이 같은 아쉬움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은 시점에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죽음 앞에서의 믿음

 

의심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저자의 책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가 종교를 쉽사리 가지지 않을 것이란 추측이었다. 당연했다. 종교야말로 누군가의 의심이 요구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이 많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필자 또한 종교에 회의적이었다. 믿음이란 불변하지 않기에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의 존재가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삶이 바닥을 쳤고 심적으로 너무 힘들 때, 그간 거부해왔던 신을 마주했다. 신에 의지하는 동안 미약한 인간인 자신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신앙을 가지기로 결심했다. 다만, 소위 말하는 예수쟁이가 되어 타인에게 내가 옳다고 믿는 종교를 강요하게 되는 수준으로 (내가 모르는 새에) 발전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 이성을 위한 1%의 파이를 머릿속에 박아두었다. 아무리 신이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옳다고 해도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합당한 필요와 근거 없이 함부로 신앙을 제안할 수는 없다. 되려 반감을 살 수 있기에 지양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그렇게 전도가 쉬웠다면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의심 끝에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지요. 다만 이 믿음은 의심에 기반을 둡니다. 신앙과 같은 맹목적 믿음과는 궤를 달리해야 합니다. 

영생을 위해 내 이름을 남기겠다는 생각만 있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남들처럼 선/악, 옳음과 그름의 구분이 확실했다면 좀 편했을까요? 주변 사람이 추천하는 길이 정말로 나에게 맞는 길인지 늘 의심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저 역시 싫어하는 일은 죽도록 안 해요. 좋아하고 재미를 느껴야만 고통스러워 하는 편이죠. 풀리지 않는 문제에 2~3시간을 소비하는 게 비효율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삶이 점점 죽음으로 가고 있는데 수학 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하는 게 내 인생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느꼈어요.

 

책을 읽으며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위 상자에서 "남들처럼 선/악, 옳음과 그름의 구분이 확실했다면 좀 편했을까요?"라는 문장이었다. 살다 보면 말이다, 내가 바라보았을 때에는 상황이 돌아가는 낌새를 세세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판단의 기준 또한 모호한 때가 있는데 누군가는 재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정리한다. 되돌아보면 그 판단이 정확하게 모두의 입장을 고루 고려하여 내려진 것이 아님에도 그 누군가는 특정한 기준하에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잘못했다고 여겨지는 다른 누군가는 질책을 받게 된다. 

 

빠르게 판단을 내리는 누군가는 정말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모두를 아우를 정도로 합리적이고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늘 궁금했다. 어린 나의 눈으로 보아도 판단에는 구멍이 있었고 누군가는 불만을 가졌다. 상황을 더 넓게 보는 꼼꼼한 사람이었다면, 다른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이 가지는 시각이 그리고 내가 가지는 시각이 편협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며 살아왔더랬다. 아직도 무엇이 옳은 것인가 늘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정답은 발견하지 못했다.

 

 

 

행복한 자아

 

아래와 같은 저자의 문장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둔다. 필자가 인생의 바닥이라고 불리우는 시기를 경험했을 때 든 생각도 아래와 같았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나 자신의 가치를 폄훼하고 쓸모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무언가를 노력했다면, 남는 것이라도 있었을 터인데 무기력감에 휩싸여서 그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해내지 못해 아쉬운 부분도 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본다. 한국 사회에서 12년간의 정규교육을 받으며 무엇을 열망하도록 배워왔는가를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좋은 중학교,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누누히 들어왔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너무나도 지겹게 말이다. 그러한 반복적인 가르침은 내 속에서 반항심을 기르는 씨앗이 되었고,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근본적으로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때 내린 결론은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단 하나의 결론만 머릿속에 맴도는 것이 이 사회가 원하는 것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미적분, 기하와 벡터를 활용할 순간이 얼마나 온다고 이렇게 치열하게 점수화하며 학생들의 등급을 매기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인지. 그래서 좋아하는 과목, 그리고 앞으로 하고싶은 공부에 도움이 될만한 과목만 공부했다. 어차피 수학머리가 없어서 억지로 했어도 결과가 좋지 않았을 터이다.

 

가치 있는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남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는 강박감이 절 괴롭혔습니다. 

현재에 충실 하라는 말이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은 평생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기에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족을 얻으려면 기준이 되는 불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불만족을 고통이라 부릅니다. 삶이 행복하다는 건 고통을 잠재울만한 만족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죠.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내가 인생에서 무얼 하고 싶은지를 알아간 후에야 나의 가치가 타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음을 체감했다. 공부를 잘하면 학교 선생님들한테 칭찬을 받았던 어린 시절은 과거일 뿐이다. 이제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나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깨닫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고 살아가야 한다. 

 

 

주체적인 삶

 

이제까지 나의 가치를 내 안에서 찾으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저자는 실상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이 운명이 우리를 객체로 존재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저자의 말에도 동의한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끝나기 전에는 나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로 뜻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나아간다면, 그 자체만으로서 주체적이라고 평가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믿고 있는 가치는 죽음 앞에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멸할 수밖에 없는 필멸의 운명은 우리가 객체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객체로 태어나 존재하며 자연환경에 맞게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 그것이 인간 존재의 말로입니다.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책이랑 강의 등에서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의적으로 바라볼 때 인간은 절대 주체적일 수 없죠. 이 모순적 상황은 사람을 절망케 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자기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나'가 되지 못할 때 절망한다고 했습니다. 

가치란 비교를 통해 생성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고려하면 모든 것의 가치가 상실되는 상황이 옵니다. 즉,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같은 뜻입니다. 

남의 길을 무조건 따라갈 필요 없습니다. 각자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세계의 신인 당신이 가는 길은 자신이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세계는 서로 얽혀 새로운 빛을 뿜어낼지도 몰라요. 나의 세계와 당신이란 75억 명의 신이 모두 조화롭게 공존하는 이상향. 그 세계를 한 번 믿어 봅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각자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고 있기에, 다른 이들의 조언이 무조건 옳은 것인 마냥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수용하되,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면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게 된다. 매 순간 의심하며 무엇이 옳은지, 어떤 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인지 등을 고루 판단하여 자신만의 길을 구축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메시지로 읽혔다. 

 

 

 
의심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
“당신이 바라 마지않았던 돈과 명예, 그리고 로맨스가 정말로 어릴 때부터 스스로 원했던 건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념이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세요. 어릴 때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지금이 같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가치관의 변화를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사회를 위한 통념에 길들 여지는 과정입니다. 왜 ‘의심’인가? 어릴 때 우리들은 모두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다만 세상은 그걸 원치 않았습니다. 문제를 말하면 프로 불편러라고 말하고 공정한 절차로 진행되는지 의문을 제기하면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질타하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화의 원동력은 다양한 가치관에서 나옵니다. 과거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현대는 더 많은 가치관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통념을 의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이 살면서 느껴봤을 가치관을 제가 겪은 일화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의심 많은 사람으로 한평생 살아온 전 모두가 생각해봤을 의문에 대해 밑바닥까지 생각하고 파헤치려 했습니다. 의심 끝에 통념을 해체하고 여러 석학의 지식을 근거로 각자가 가진 고정관념을 모두 해체하려 글을 썼습니다. 그 끝에 서로가 직접 삶의 의미를 만들고, 주체가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바람으로 책의 끝을 맺었습니다. 이 책은 여러분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던 회의의 DNA를 다시 떠올리기 위해, 같이 여행을 떠나볼까요?
저자
한성욱
출판
하모니북
출판일
2020.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