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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문학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 줄거리 요약·후기·해석

 

그간 여러 책을 읽었지만 소설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던 탓에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가 누군지는 알고 있어도 그의 책은 단 한 권도 읽어보지 않은 터였다. 그런 나는, 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담아낸 43년간 품어온 상상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책 표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무라카미 하루키

 

책과의 만남

 

얼마 전, 고향에 내려갔을 때 유년시절에 자주 가곤 했던 서점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집에서 그닥 멀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교보문고나 예스24 등 온라인 서점을 통해서 책을 구입하곤 했었기에 오프라인 상에서 서점을 자주 가지 않게 되었다. 그날은 서점 주변에 볼일이 있다가 시간이 붕 뜨는 바람에 우연찮게 서점에 방문했던 것이다. 매년 꾸준히 고향에 내려왔지만, 서점 근처에는 자주 가지 않았기에 10년이라는 세월을 꽉꽉 채워 넘겨서야 다시 방문하게 된 셈이 되었다. 

 

서점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10년이란 세월을 그대로 붙잡아 둔 듯한 모습. 주인 아저씨도 그저 몇 년 정도의 주름이 더해진 얼굴을 하고 계셨을 뿐이었고 이를 제외한 모든 것은 가히 '그대로'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였다. 서점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신간코너에 눈이 갔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구매했다.

 

그의 책을 구매한 첫 번째 이유는, 책의 표지가 눈이 편안해지는 초록색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책 표지와 별개로 한 겹 더 둘러진 가느다란 띠에 적힌 문구 때문이었다. 출판사는 문학동네였는데, 3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히 출간한 책인 듯 보였다. 

 

첫 발표 이후 43년, 
마음에 품어왔던 소설을 마침내 완성하다!

현지 출간 후 상반기 베스트셀러 1위

하루키적 상상력의 모든 것이 담긴 결정적 세계!

 

 

이렇게 작성된 홍보문구에 나는 현혹되고 말았다. 10년이란 시간을 넘어 방문했던 유년시절 기억 속의 서점에서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갈 수 없었기에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기에 e-book을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구입하게 된다. 

 

 

구성 및 줄거리 요약

 

이 장편소설의 차례는 너무나도 간결했다. 1부, 2부, 3부와 작가 후기. 이렇게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되며,  각 부에 따른 구분 또한 그저 순차적인 숫자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간결한 구성과는 다르게 작가 후기까지 모두 포함한 이 책의 분량은 700페이지를 거뜬히 뛰어넘기에 단번에 완독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

 

 

1부

 

1부에서는 주인공이 고등학생 시절 온 힘을 다해 사랑했던 소녀와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주인공이 소녀와 이야기를 주고 받는 내용과 다른 세계의 도시에 떨어져 지내기 시작한 주인공의 내용이 교차적으로 배치되어 소설이 전개된다. 소녀가 묘사한 도시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그 안에 발을 들이고 또 벗어나고자 하는 주인공의 과정을 그린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p. 111)

 

 

소녀는 주인공에게 자신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자신의 본체는 다른 세계에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런 소녀는 주인공에게 그 도시가 어떠한 모습인지 그리고 어떤 곳인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소녀와 멀리 떨어져 지냈던 주인공은 편지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와의 편지는 끊어지고 만다. 주인공은 갑자기 사라진 소녀의 집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생생하고 강렬했던 소녀와의 추억을 마음 속에 품은 채 대학교에 진학했고 괜찮아 보이는 이성들과도 여러 번 연애를 하고 번듯한 직장에도 취직을 하고.. 어느덧 4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고등학생 시절의 그녀는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소녀가 말한 도시에 떨어져 있었다. 주인공은 '꿈 읽는 자'로서 그 도시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꿈 읽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도시 밖에 그림자를 떼어두고 와야 하고 눈 또한 포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그 도시의 생활에 차차 적응해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본체와 떨어진 그림자가 죽어가고 있었고, 그림자는 주인공에게 도시로부터의 탈출을 제안한다. 탈출의 기로 앞에 선 때, 그림자와 함께 떠나고자 했던 주인공은 갑작스레 마음을 바꾸었고 그의 그림자만 탈출한다.

 

 

 

 

2부

 

2·3부에서는  1부와는 달리, 두 개의 이야기가 지그재그식으로 전개되지 않기에 내용을 순차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소녀가 알려준 도시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시착한 주인공이 탈출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탈출하지 않았던 순간에서 마무리되었던 1부의 이야기 이후부터 2부가 시작된다. 

 

그 도시에서 자신의 그림자만 탈출한 줄 알았던 주인공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현실세계였다. 자신이 왜 다시 돌아온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여러 생각에 허덕이던 그는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본래 살던 곳에서 떨어진 산골마을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된다. 전임 도서관장 고야스 씨의 도움을 받아 업무를 수행해 나가던 중, 도서관 지하에 위치한 정사각형의 방에서 그 도시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게 된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p. 452)

 

 

어느 날 고야스 씨는 도서관으로 주인공을 불러내어 자신이 그림자가 없는 인간이며 이미 죽었음을 고백한다. 또 다른 날에는 주인공이 평범하지 않았기에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특별한 장소인 도서관을 맡아주십사 하였다고 설명하고 홀연히 사라진다. 고야스 씨가 오래간 주인공을 찾아오지 않던 날,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등장하고 주인공에게 그 도시의 지도를 그린 종이를 건넨다. 그 도시에 가고 싶었기에 주인공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주인공이 그 도시로 가는 법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도 어느새 소년은 그 도시로 가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사라진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찾는데 몰두했고, 주인공은 소년의 형상을 한 인형에게 한쪽 귀를 물리는 꿈 같은 것을 경험한다.  일련의 과정들이 일어나는 동안, 주인공은 마을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여사장(사랑했던 고등학생 시절의 그녀와 나름 닮은 면이 있다)에게 호감 아닌 호감을 가지게 된다. 2장의 마지막에서는 현실세계에서 지내던 주인공이 강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젊어지기 시작하더니 10대 시절의 소녀를 다시 만나고, 소녀로부터 '너와 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3부

 

3부의 시작은 현실세계가 아닌, 온전히 그 도시에서부터이다. 그림자만 탈출하고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온 줄 알았던 나는 그 도시에 있다. 처음부터 그 도시에 있었던 것인지, 어느 순간 다시 돌아온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주인공은 1부에서의 '꿈 읽는 자'로서의 생활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서관으로 출근하던 길, 현실세계에서 보았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강 근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소년은 주인공에게 찾아와 하나가 되기를 청했고, 주인공은 이를 받아들인다. '꿈 읽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출중한 능력을 가진 소년이 주인공의 안으로 들어오자 꿈을 읽는 업무에는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주인공은 알 수 없는 내적인 흔들림을 느끼게 되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주인공이 도시를 떠날 때가 된 것이라 말한다. 도시를 떠나 바깥에 있는 그림자와 하나가 될 것이라 한다. 

 

내가 나 자신의 본체건, 그림자건.
어느 쪽이 됐건 지금 이렇게 여기 있는 내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가 곧 나인 거죠.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야 할 거예요. (p. 751)

 

 

주인공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남겨둔 채, 도시를 떠나기로 다시 한번 마음을 먹는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집필과 출간에 얽힌 이야기가 특별하다. 1979년 데뷔 이래, 하루키는 각종 문예지에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발표했고, 대부분 그 글들을 책으로 엮어 공식 출간했다. 그중 유일하게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아 팬들 사이에서도 오랜 미스터리로 남은 작품이 문예지 〈문학계〉에 발표했던 중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이었다. 코로나19로 사람들 사이에 벽이 세워지기 시작한 2020년, 그는 사십 년간 묻어두었던 작품을 새로 다듬어 완성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삼 년간의 집필 끝에 총 3부 구성의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세상에 내놓았다. 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70대의 작가가 청년 시절에 그렸던 세계를 43년 만에 마침내 완성한 것이다. “내가 쓴 소설 가운데 책이 되어 나오지 않은 것은 거의 없을 텐데, 이 작품만은 일본에서도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아직 한 번도 출판되지 않았다. (…) 그사이 나는 서른한 살에서 일흔한 살이 되었다. (…) 어쨌거나 이 작품을 이렇게 다시 한번, 새로운 형태로 다듬어 쓸 수 있어서(혹은 완성할 수 있어서) 솔직히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나에게 이 작품은 줄곧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신경쓰이는 존재였으므로. (…) 그것은 역시 나에게(나라는 작가에게, 나라는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가시였다. 사십 년 만에 새로 쓰면서 다시 한번 ‘그 도시’에 돌아가보고, 그 사실을 새삼 통감했다.” _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작가 후기에서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3.09.06

 

 

 

후기

 

철학적인 요소가 짙게 드리워진 이 책은 1번만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에 1 회독 시에 들었던 생각이 2, 3 회독 시에는 더 발전될 수도 있고, 새로운 생각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 여유가 생기면 찬찬히 다시 한번 읽고 싶어지는 책이랄까. 처음 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력에 감탄을 여러 번 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후기에서 '후기를 덧붙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보편적인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내가 전반적인 이해가 쉽지 않았다고 느끼는 작품이었기에 작가 후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부까지 다 읽고 나서 작가 후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속은 작품의 탄생배경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소설을 읽는 내내 정리가 되지 않는 듯한 궁금증에 대해 시원하게 설명하는 내용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의도를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가장 마지막 문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p. 767)

 

 

진실이란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를 말하고 싶다는 듯이 느껴졌다. 진실이라는 것이 주인공이 궁금해하던 '진실된 나 자신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 같다고 한다면, 주인공의 본체와 그림자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본체와 그림자는 사실상 동일하며, 의식하고 있는 순간의 내가 바로 나인 것이다. 

 

사실상 도시 안의 주인공 본체와 도시 밖의 그림자가 같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작가는 그 둘의 직업을 비슷하게 설정해둔 듯하였다. 도시 안에서는 도서관에서 '꿈 읽는 자'로 근무했고, 도시 밖인 현실세계에서는 도서관장으로 근무한다. 도서관장으로 근무하기 전에는 도서 관련 업종에 근무하였으니 크게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2부에서부터  등장했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3부에서 주인공과 하나로 결합되면서 이 소년과 주인공이 서로 다른 등장인물이지만 결국 같은 자아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1부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본체를 도시 안에 남기면서 그림자를 도시 밖으로 보냈던 것처럼,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도시 안에 두고서 자기 자신(본체)을 도시 밖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카페 여사장은 주인공이 사랑했던 고등학생 시절의 소녀와 동일인물일까? 작가가 묘사한 카페 여사장의 모습은 그 시절 소녀와 닮아있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하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말조차 걸지 않는다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주인공과 카페 여사장이 같은 부류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준다. 몇십 년 전에 사라진 소녀의 그림자가 카페 여사장이라면? 도시 안의 소녀는 (장소는 도서관이지만) 주인공에게 약초를 달여 차를 내어주고 사과로 만든 간식을 만들어 준다. 소녀와 카페 여사장의 일상이 또 닮아있지 않은가. 그리고 과거의 소녀는 주인공에게 당장은 육체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다고 했었고, 카페 여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의 말미에서 도시 안의 주인공 본체는 도시 밖의 그림자와 하나가 되기 위한 선택을 한다. 아마도 그는 도시 밖의 그림자를 만나 하나가 된 후에 카페 여사장과 행복하게 지내지 않을까? 주인공이 작별인사를 고할 때, 도시 안의 소녀에게도 미묘한 변화는 있었다. 그 변화가 의미하는 것이 도시 밖 현실세계의 그림자로 향하고자 하는 소녀의 생각을 의미한 것인지는 정말 모르겠다. 만약 소녀도 그녀의 그림자를 찾아 떠난다면, 카페 여사장은 오래간 품어온 그녀만의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리뷰를 쓰고 기록으로 남기고자 다시 시작한 독서였는데 처음부터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책을 골라버렸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의도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하며 읽어야했고, 이러한 구상을 하게 된 작가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림자와 본체라는 비유에서 벗어난다면, 이중/다중적인 인격 또는 시공간의 유연함, 상대성 등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였다. 진실과 껍데기를 드나드는 글의 전개에 아직까지도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고 혼란스럽지만, 분명 한 두 번 더 읽으면 궁금했던 점들이 조금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